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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Levinson Nº31 Reference CD Transport 복원기

  • 2026.08.12 09:54
  • audio/source

Prologue - 오래된 버킷리스트, Mark Levinson Nº31

 

20여 년 전, 한창 오디오에 빠져 바꿈질과 매칭에 정신없던 시절, 오디오 잡지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오래 눈에 남았다. 검은 메탈 프레임, 단정하면서도 육중한 몸체, 조약돌처럼 빛나는 회색의 둥근 버튼들. 그리고 거대한 상판을 들어 올려 CD를 얹고 큼지막한 스테빌라이저를 덮고 다시 상판을 닫아야 하는, 범상치 않아 보였던 방식의 CDT ,,,

 

Mark Levinson Nº31 Reference CD Transport.

 

하이엔드 오디오의 선구자라는 Mark Levinson의 제품 중에서도 이름부터 당당하게 ‘Reference’를 붙인 기계였다. 언젠가는 꼭 한번 써보고 싶었다. 하지만 희소한 데다 가격까지 만만치 않았으니, 말 그대로 오랫동안 마음 한쪽에 넣어둔 버킷리스트였다.

*https://www.stereophile.com/content/mark-levinson-no31-reference-cd-transport

 

 

 

 

그러다가 우연히 영입했던 Mark Levinson Nº36 DAC가 마음에 들어 Nº37 CDT를 열심히 찾아보다가 결국 샵에서 상태 좋은 No36 SL, No37L 세트를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Nº31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된 줄 알았다.”

“그런데 버킷리스트라는 게 참 묘하다. 비슷한 것을 가져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곳에서  Nº31 한 대가 나타났다.”

 

 

 

Mark Levinson Nº30/31 Reference Digital System의 탄생

 

1992년 Madrigal 시대의 Mark Levinson에서 출시된 Nº31은 외부 진동의 영향을 철저히 차단하는 독특한 트랜스포트 메커니즘(Transport Mechanism)과 디지털 신호 전송 과정에서 지터(Jitter)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재생 성능을 구현한 CD 트랜스포트이다. 여기에 당시 Mark Levinson 특유의 타협 없는 설계와 만듦새가 더해지며 Nº31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디지털 소스기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된다.

 

출시 당시 미국 가격은 $8,495였다. 여기에 짝을 이루는 Nº30 Reference DAC는 무려 $13,950. 둘을 합하면 $22,445였다. 당시 환율로 단순 환산해도 약 1,770만원이며, 수입비용과 세금·유통마진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2천만원대 중후반에 이르는 시스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앰프와 스피커는커녕, CD에서 디지털 신호를 읽고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는 두 덩어리만의 가격이었다.

 

만약 요즘 출시되었다면 얼마일까 궁금해서 90년대 초 대우 브로엄과 현대 쏘나타 골드의 판매가격을 검색해서 , 자동차 가격을 기준으로 Nº30/31 시스템의 현재 가치를 환산해보니 대략 5천만원 안팎에 해당된다. 접근이 쉽지 않은 가격인데 30여년 세월 덕분에 운이 좋으면 오래된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www.hifinews.com/content/mark-levinson-no30-dual-box-dac

 

 

 

 

 

 

Nº31은 어떤 CD Transport인가

 

Mark Levinson Nº31은 ‘CD에서 디지털 데이터를 읽어낸다’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정밀공학으로 다룬 기계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CD에서 읽어낸 데이터는 결국 디지털인데, 트랜스포트에 이렇게까지 투자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마크레빈슨의 엔지니어들은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데이터를 읽을 수 있도록 구현 가능한 모든 것을 쏟아 부어 Nº31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Mark Levinson Nº31을 지금도 단순한 구형 CD Transport가 아니라, 한 시대의 디지털 소스기기 설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학적 유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https://www.hifi-inside.com/index.php?option=com_phocagallery&view=category&id=1834&Itemid=0#&gid=1&pid=17

 

 

 

 

 

먼곳에서 서울까지 — 그리고 READING → NO DISC

 

어느 날 먼곳에서 올라온 Nº31 한 대를 발견했다.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Nº36/Nº37로 달래 놓았던 ‘나머지 2%의 갈증’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Nº36/Nº37은 양도하고, DAC는 오디오 멘토이신 SWH 형님 제작해서 쓰시다가 물려 주신 자작 DAC를 사용하면 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빛의 속도로 기기 재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https://skylark.tistory.com/481

 

형님께서 만드신 dac

오래간만에 기기 사진을 찍으며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형님께서 자작한 dac 뚜껑을 따보았는데 아름답죠 ㅎ 형님이 10여년 전, 일본에 계실 때 자작하셨는데 부품선정부터 회로설계

skylark.tistory.com

 

 

 

 

 

 

남은 문제는 단 하나. 먼곳에 있는 이 20kg짜리 Nº31을 서울까지 어떻게 무사히 데려올 것인가 였다. 판매자와 통화하니 일반 택배 대신 화물차 운송을 권했다. 결국 운송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Nº31을 실은 화물차가 먼곳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새벽 5시 30분, 부지런한 기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 집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한마디로 전광석화 같은 거래였다. 20kg에 육박하는 육중한 Nº31을 집으로 옮기는데도 이상하게 백지장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기계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는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30여 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외관 상태는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카페트위에 내려 놓자마자 전원을 넣었다. 잠시 후 디스플레이에 불이 들어왔다. OPEN 버튼을 누르자 특유의 소리와 함께 묵직한 상판 트레이가 천천히 올라갔고, 그 아래 숨어 있던 스태빌라이저와 픽업 메커니즘도 보였다.

 

CD 한 장을 올리고 트레이를 닫았다. 디스플레이에 잠시, READING.,,,

 

그리고…….

 

 

 

 

NO DISC.

 

분명 CD를 넣었다.그런데 NO DISC라니,,,  순간 멍해졌다.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지나갔다. ‘설마…… 잘못 산 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Nº31이 집에 도착했지만 아직 음악 한 소절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디스플레이에는 야속하게 NO DISC 네 글자만 떠 있었다.

 

 

 

 

NO DISC — 30년 된 Reference Transport와의 첫 싸움

 

판매자 분께 연락을 드려 현상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 판매자도 구입할 때 고속버스편으로 운송했는데 이상이 없었다는 답변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마크레빈슨 오버홀이 가능하실만한 수리기사 네분을 소개받아 증상에 대해 문의 문자를 드렸는데  A전자 B사장님께서 "운송할 때 하판의 Transport Screw 2개를 잠궜나요?"라는 질문을 듣는 순간 "앗차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B사장님의 말씀으로는 Transport Screw를 잠그지 않으면 운송과정에서 픽업모듈이 주변 부품과 충돌을 일으키며 데미지를 입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을 하셨다.

 

열심히 검색해보니 매뉴얼에 하판바닥에 운송과정에 픽업을 고정하는 Transport Screw가 있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다음 날 바로 A전자로 달려가 Nº31 뚜껑을 열고 점검을 시작했다. 먼저 트레이를 열면 좌우에 있는 육각나사 6개를 풀면 상판 트레이 모듈을 분리할 수 있다. 그런데 상판트레이와 픽업모듈 사이를 지탱하는 고무발 4개중 2개는 녹아 흘러내린 상태였고 오른쪽 모듈장치를 감싼 고무 또한 일정부분은 녹아내렸고 붙어있는 고무도 열화된 상태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B사장님 말씀으로는 소음과 진동을 방지를 위해 고무를 사용했는데 30여년 세월을 이기지 못해 열화되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속살을 드러낸 본체 내부 모습이다. 상판 트레이의 고무가 열화되면서 흘러내려 픽업 모듈과 부품들에 덕지덕지 묻어있어 크리닝이 필요해 보었다.

 

 

 

 

 

 

 

 

또한 기판 곳곳에 사용된 오래된 전해콘덴서들도 점검 대상이 되었다. B사장님은 30년 이상 경과한 전해콘덴서의 특성 변화와 향후 신뢰성을 고려해 일부를 예방적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다.

 

 

 

 

 

 

 

 

픽업모듈을 분리 후 본체 모습이다. 4개의 스프링위에 픽업모듈이 장착되는데 위 아래 보이는 2개의 홀이 B사장님이 언급했던 Transport Screw가 장착되는 홀이다. 앞서 사용했던 사용자중의 한명이 Transport Screw를 분리하면서 망실되었을 것이다.

 

 

 

 

 

 

 

 

픽업모듈 한쪽은 심하게 패여있었는데 B사장님은 운송과정에서 넓적한 흰색 케이블과 계속 마찰을 일으키며 손상을 입은 것 같다고 추정하셨고, 그 과정에서 픽업이 데미지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다.

 

 

 

 

 

 

 

 

 

 

 

 

 

 

 

드디어 Nº31은 속살을 드러냈다. 30년이라는 시간은 겉모습보다 내부에 더 많은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상판 트레이 아래의 고무는 열화되어 녹아내렸고, 끈적해진 잔여물은 픽업 모듈과 주변 부품에까지 묻어 있었다. 픽업 모듈 한쪽의 케이블 역시 심하게 패여 있었다.

 

B사장님의 판단은 픽업 상태를 다시 점검하는 동시에 노후 전해콘덴서를 교체하고, 열화된 고무를 모두 제거한 뒤 내부를 깨끗하게 클리닝하는 것이었다. 처음 Nº31을 집으로 들여왔을 때만 해도 나는 픽업의 접촉불량 정도의 문제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는 달라졌다.

 

30년 된 Reference Transport를 다시 깨운다는 것은 단순히 CD를 읽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기계 안에 남겨놓은 흔적을 하나씩 걷어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Nº31과의 첫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고, 이 양반아. 30년을 버텼으면 탈이 날 만도 하지. ㅎㅎ

 

 

 

Nº31을 다시 깨우다 — 픽업 점검과 30년 묵은 부품들의 교체

 

드디어 오버홀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Nº31,

흘러 내린 열화된 고무들은 말끔히 제거 되었고 전해컨덴서 일부가 변경된 모습이다.

 

 

 

 

 

 

 

 

 

 

 


B사장님은 기판을 점검하면서 노후된 전해콘덴서들을 신품으로 교체했다. 사진 왼쪽의 은색 부품들이 Nº31에서 떼어낸 기존 콘덴서들이다. 디지털 기기라고 하지만 Nº31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국 안정적인 전원과 서보 회로를 떠받치는 것은 수많은 아날로그 부품들이다. 30년이 넘은 기계를 다시 제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은 픽업 하나를 수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Nº31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해콘덴서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전원 레귤레이터와 서보 회로, 디지털 제어부 등 기판 곳곳에 비교적 작은 용량의 전해콘덴서들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대형 전해콘덴서 중에는 330µF / 25VDC, 105°C 사양이 확인되며, 몸체에는 9415H2라는 코드도 남아 있다. 이것이 제조일자 코드라면 1994년 15주차 생산품일 가능성이 있다. 

 

결국 30년 된 Reference CD Transport를 복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낡은 픽업 하나를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사진에서 파란색으로 보이는 부품들이 이번 오버홀 과정에서 교체된 전해콘덴서들이다. 특히 CPU-31 보드와 서보·전원 계통을 중심으로 노후된 전해콘덴서를 신품으로 교체했다. 

 

 

 

 

 

 

 

 

 

 

 

 

 

 

 

 

 

 

 

 

 

 

 

 

 

 

 

 

 

 

 

 

 

 

 

 

 

 

 

 

 

 

 

 

 

 

 

 

 

 

 

사진 속 은색 부품들이 Nº31에서 떼어낸 기존 스프라그 전해콘덴서들이다.

 

30년 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좀 쉬어라. ㅎㅎ

 

 

 

 

 

뜻밖의 선물 - Transport Screw

 

오버홀을 마친 뒤 B사장님은 Nº31을 돌려보내기 전에 기기를 세워 하판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이전에는 비어 있던 두 개의 홀에 큼지막한 나사가 장착되어 있었다. 오버홀을 맡기면서 Transport Screw의 정확한 사이즈를 파악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수고스럽게도 세운상가를 직접 뒤져 동일한 규격의 인치 스크루를 구해 오셔서 선물로 주셨다. 사이즈만 알아봐 주셔도 고마운 일이었는데 뜻밖의 선물까지 받으니 정말 감사했다.

 

Nº31처럼 픽업 메커니즘이 플로팅 구조로 설계된 CD 트랜스포트는 이동 중 충격에 민감하다. 특히 20kg 가까운 이 덩치를 화물차에 싣고 움직이는 동안 내부의 픽업 메커니즘이 자유롭게 흔들리도록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운송할 때는 이 두 개의 Transport Screw로 플로팅 메커니즘을 고정해 주어야 한다.

 

 

처음 Nº31을 가져올 때는 이 스크루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B사장님이 구해주신 두 개의 스크루 덕분에 Nº31은 이번에는 제대로 몸을 묶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30년 만에 다시 제자리를 찾은 두 개의 Transport Screw, 이제 먼 길도 걱정없다.

 

 

 

 

 

 

 

 

그리고, 사라진 나사 하나

 

 

Nº31을 집으로 가져올 때부터 어딘가에서 작은 덜렁거림이 들렸다. 당시에는 20kg 가까운 기계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모든 작업을 마치고 하판을 살펴보다 뒤쪽을 고정하는 나사 하나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옆에 남아 있는 검은색 십자머리 나사가 오리지널. 똑같은 나사를 구하지는 못해 규격이 맞는 육각머리 나사로 일단 고정했다.

 

그제야 처음 Nº31을 가져올 때 들었던 그 덜렁거리는 소리가 떠올랐다. 아마 그때부터 이 녀석은 나사 하나를 어디엔가 흘리고 다녔던 모양이다. 30년 된 기계를 데려온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고무를 걷어내고, 콘덴서를 갈고, Transport Screw를 찾아주고, 마지막에는 잃어버린 나사까지 하나 채워 넣었다.

 

이제 정말 빠진 거 없지? ㅎㅎ

 

 

 

 

 

다시 돌아온 Nº31 - PLAY 버튼을 누르다

 

드디어 무사귀환.

 

오버홀을 마치고 돌아온 Nº31을 일단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대로 자리를 잡아주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이 녀석이 정말 살아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Nº31 → SHW 형님 자작 DAC → Mark Levinson ML-7A → SHW 형님 자작 6BQ5 PP 파워앰프 → AR4. 케이블을 연결하고 전원을 넣었다. 트레이를 열어 CD 한 장을 올리고 다시 닫았다.

 

 

READING. 며칠 전 이 자리에서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던 NO DISC 대신 익숙한 트랙과 시간이 붉은 디스플레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PLAY. 잠시 후 첫 곡이 흘러나왔다. “아, 이 양반이 살아났구나.” 별것 아닌 순간인데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다. 먼 곳에서 화물차에 실려 올라와 NO DISC를 띄우고, 장인 B사장님의 손길로 30년 묵은 고무와 콘덴서를 걷어내고, 픽업을 점검받았던 Nº31이었다. 이제야 이 녀석이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도감이 가라앉고 음악을 듣기 시작하자 조금 의외였다. Nº36/Nº37 조합을 오래 들었던 기억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Nº36/Nº37이 빛이 위쪽으로 열리는 듯 투명하고 경쾌하며,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쪽이었다면, Nº31과 SHW DAC의 조합은 무게중심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앉았다. 음상이 한층 커졌고, 소리의 몸통에는 살이 붙었다. 저역은 양감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바닥을 단단하게 받쳐주었고, 전체적인 음의 밀도도 높아졌다. 화려하게 앞으로 튀어나오기보다는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묵직하게 음악의 골격을 세워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첫인상을 한마디로 적어놓았다.

“한 톤 어둡고, 선은 굵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이 장사다.”

 

물론 이것을 Nº31 하나의 소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Nº36/Nº37은 Mark Levinson의 한 세트였고, 지금은 Nº31에 SHW 형님의 자작 DAC를 물린 전혀 다른 조합이다. 프리와 파워, 스피커까지 생각하면 단순한 Transport 간 비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30년 전 Mark Levinson이 Reference라는 이름을 붙였던 이 거대한 CD Transport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내가 익숙하게 듣던 음악을 조금 다른 표정으로 다시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Nº31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음악 좀 들어보자.

 

 

 

 

30년 묵은 때를 벗겨 내자

 

30년의 세월을 버티고 먼 길을 달려온 Nº31에는 묵은 때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연마제나 화학약품을 쓰면 좀 더 쉽게 닦일지도 모르지만, 귀하신 Nº31에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평소 기기 닦을 때 애용하는 만능크리너를 꺼내 들고 한참을 닦았다. 닦고 또 닦고. 특히 회색 버튼들은 손때가 많이 묻어 있어 제법 공을 들였는데, 묵은 때가 벗겨지자 원래의 뽀얀 색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버홀은 B사장님이 해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내 차례다. 속병은 고쳤고, 30년 묵은 때까지 벗겨냈다. 검은 몸체도 제법 말끔해졌고 회색 버튼들은 다시 조약돌 같은 얼굴을 되찾았다. 이 정도면 이제 음악 들을 준비는 끝났다.

 

 

 

 

 

 

 

오버홀보다야 쉽겠지 했는데… 버튼 하나 닦는 것도 일이었다. ㅎㅎ

 

 

 

 

Episode -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 ,  또 NO DISC?

 

무사 귀환 이튿날 아침.

Charlie Haden / Pat Metheny의 Beyond the Missouri Sky를 올렸다.

그런데……

NO DISC, 아니, 이 양반아. 어제 살아났잖아. ㅠㅠ

 

트레이를 다시 열었다 닫아보고, CD를 다시 얹어보고, 시디와 스태빌라이저 상태도 살펴봤다. 다시 PLAY. 이번에는 ERROR 03.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이 무거운 걸 들고 또 B사장님한테 달려가야 하나…….’

 

그러다 혹시나 싶어 CD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앗,,,DVD. 그제야 생각났다.

 

내가 가지고 있던 Beyond the Missouri Sky는 일반 CD가 아니라 CD와 DVD가 함께 들어 있는 더블 앨범이었다. 아침부터 음악을 듣겠다고 아무 생각 없이 DVD를 Nº31에 올려 놓고는, NO DISC가 뜨자 혼자 식겁했던 것이다. Nº31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 자라 보고 또 놀란 셈이다. ㅎㅎ

 

 
 

 

Epilogue — 30년 된 디지털 기계를 다시 듣는다는 것

 

Mark Levinson Nº31은 단순히 CD에서 디지털 데이터를 읽어내는 기계가 아니다. ‘CD에서 데이터를 읽어내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정밀공학으로 다룬 기계’에 가깝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CD에 기록된 것은 어차피 디지털 데이터인데, 그것을 읽어내는 트랜스포트에 과연 이렇게까지 많은 물량과 기술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Nº31이 만들어지던 1990년대 초, Madrigal의 엔지니어들이 던졌던 질문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디스크가 회전하고, 레이저가 트랙을 따라가며, 그 안의 데이터를 읽어내는 모든 과정을 얼마나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무겁고 두꺼운 Transport Base, 플로팅된 픽업 메커니즘, 독립적인 Servo/RF 회로, FPGA와 Firmware ROM, 세분화된 전원부와 곳곳에 배치된 수많은 부품들. Nº31의 뚜껑을 열어보면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CD 한 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 어디까지 할 것인가.

 

그리고 Madrigal의 대답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Nº31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단순히 “옛날 하이엔드 오디오는 부품을 참 많이 썼구나” 하는 데 있지 않다. 기계공학과 광학, 아날로그 회로와 디지털 회로가 한데 얽혀 있고, 당시의 엔지니어들이 디지털 오디오의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어디까지 집요하게 밀어붙였는지를 이 한 대의 기계 안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Nº31은 이제 최신의 디지털 기기와 성능을 겨루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엔지니어들이 디지털 오디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기계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무는 녹아내렸고, 콘덴서는 늙었으며, 픽업은 더 이상 예전처럼 CD를 읽어내지 못했다.

 

NO DISC.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뚜껑을 열고, 녹아내린 고무를 걷어내고, 오래된 콘덴서를 바꾸고, 픽업을 점검하고, 잃어버렸던 Transport Screw까지 다시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PLAY 버튼을 눌렀을 때 Nº31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CD를 읽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음악을 듣겠다고 30년 된 20kg짜리 기계를 화물차에 싣고 데려와 이 난리를 쳤으니 말이다.

 

그래도 첫 곡이 흘러나오던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맛에 오래된 기계를 쓰는 거지.

 

Mark Levinson Nº31 Reference CD Transport.

 

한때는 사진으로만 바라보던 오래된 버킷리스트였고, 30년이 지나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NO DISC를 외치던 골칫덩어리였으나, 이제는 다시 음악을 들려주는 나의 Reference CD Transport가 되었다.

 

 

 

ps.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성들여 오버홀해주신 A전자 B사장님과 정성스럽게 자작한 DAC를 선뜻 양도해주신 SWH형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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